[클럽월드컵] ‘선방쇼’ 조현우만 보였다···울산, 도르트문트에 0-1 패배, 조별리그 ‘전패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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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26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TQL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조별리그 F조 3차전에서 도르트문트(독일)에 0-1로 졌다.
마멜로디 선다운스(남아프리카공화국)에 0-1, 플루미넨시(브라질)에 2-4로 패한 울산은 유종의 미를 꿈꿨으나 최종전에서도 염원했던 승점을 쌓지 못했다.
처음으로 32개 팀 체제로 열린 이번 클럽 월드컵에서는 1무만 거둬도 100만달러(약 14억원)를 확보한다. 하지만 전패한 울산은 출전비 격인 955만달러(130억원)를 제외한 추가 상금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반면 2024~2025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8강에 오르고 독일 분데스리가 4위를 차지한 유럽의 강호 도르트문트는 2승1무로 패배 없이 조별리그를 가뿐하게 통과했다.
마멜로디와 조별리그 최종전을 0-0으로 비긴 플루미넨시(1승2무)가 도르트문트에 이어 16강행 티켓을 따냈다. 마멜로디(1승1무1패)는 F조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이날 핵심 윙어 엄원상, 센터백 서명관이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자 김판곤 감독은 강상우와 이재익을 기용해 트로야크, 김영권, 루빅손과 파이브백으로 배치했다. 에릭과 라카바를 제외한 보야니치, 이진현, 김민혁도 후방으로 내려와 수비벽을 두껍게 쌓았다.
하지만 울산은 전반에만 슈팅 20개, 유효슈팅 8개를 허용하며 일방적인 공세 속에 고전했다. 킥오프 직후부터 2024~2025 UCL 득점왕 세루 기라시에게 슈팅을 내준 울산은 골키퍼 조현우의 선방이 없었다면 전반부터 큰 점수 차로 무너질 뻔했다.
전반 27분 기라시가 골대 하단 구석을 정확히 노렸지만, 몸을 날린 조현우의 감각적인 선방에 막혔다. 네 번의 유효슈팅이 모두 조현우에게 막힌 도르트문트는 5번째 시도 만에 골망을 흔들었다. 전반 35분 이재익의 안일한 패스 실수가 세계 정상급 미드필더 주드 벨링엄(레알 마드리드)의 동생 조브 벨링엄에게 연결되면서 울산이 실점했다. 김민혁의 몸싸움을 가뿐하게 이겨낸 벨링엄의 패스를 스벤손이 왼발로 마무리해 1-0을 만들었다.
기세가 오른 도르트문트는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전반 40분 카림 아데예미의 크로스를 파스칼 그로스가 왼발로 낮게 깔아 차 추가 골이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조현우가 발을 뻗어 힘겹게 막아내며 울산이 위기를 넘겼다. 전반 추가 시간에는 기라시가 수비 견제가 없는 상황에서 회심의 헤딩을 선보였으나 또 조현우에게 막혔다.
전반 내내 도르트문트의 압박에 막혀 전진하지 못하자 김판곤 감독은 김민혁과 라카바를 빼고 고승범과 박민서를 투입하며 변화를 꾀했다.
후반 3분 오른쪽 측면으로 쇄도한 강상우가 루빅손의 패스를 슈팅으로 연결했으나 골키퍼 그레고어 코벨의 정면으로 향했다. 울산의 첫 번째 슈팅이었다.
후반 초반 잠시 공세로 전환한 듯했던 울산은 후반 21분 또 한 번 실점 위기를 맞았다. 역습에 나선 쥘리앵 뒤랑빌이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골문을 위협했으나 조현우가 가까스로 쳐내 옆 그물만 때렸다.
패색이 짙어지자 김판곤 감독은 후반 34분 이희균과 이청용을 투입해 마지막 반전을 노렸으나 도르트문트가 다시 압박 강도를 올려 수세는 이어졌다. 오히려 막판 결정적 기회를 맞은 쪽은 도르트문트였다. 후반 38분 얀 쿠토가 수비 방해 없이 페널티박스에서 왼발 강슛을 시도했다.하지만 이 슈팅마저 조현우가 몸을 날려 쳐내 추가 실점을 막아냈다.
수년간 동급생을 집단폭행하고 수백만 원의 금품을 빼앗은 혐의로 조사를 받는 충남 청양의 고교생 4명이 퇴학 처분을 받게 됐다.
30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청양에서 발생한 학교폭력을 조사하는 공동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심의위)는 최근 가해 학생 4명에 대해 퇴학 처분 결정을 내렸다.
청양교육지원청은 지난 20일 학교 폭력 심의위를 개최했고, 조치 사항을 지난 27일 피해 학생인 A군 측에 서면으로 전달했다.
심의위는 가해 학생들로부터 A군을 보호하기 위해 접촉 금지와 함께 협박 및 보복 행위 금지 조치도 내렸다.
심의위는 이 같은 결정 이유에 대해 “장기간 신체폭력, 언어폭력, 성폭력, 금품갈취, 강요 등 수많은 학교폭력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며 “피해자가 중학교 때부터 3년여간 장기간에 걸쳐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시간을 보냈고 이에 따른 정신적 피해는 극심할 것으로 사료되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밝혔다.
가해 학생들과 보호자가 A군의 피해 회복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A군에게는 신체적·정신적 피해가 극심하리라 판단해 심리상담 및 치료, 요양을 지원하기로 했다.
B군 등 가해 학생들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22년 10월 같은 학교 동급생이던 A군을 집단폭행하고 돈을 빼앗는 등 지난 4월까지 3년여간 모두 165회에 걸쳐 600만원 상당의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이들은 평소 A군을 ‘노예’, ‘빵셔틀’, ‘ATM’이라고 부르며 수시로 괴롭힌 것으로 드러났다. 청양군 소재 펜션 등지에서 청테이프로 A군의 손목과 몸을 결박한 뒤 흉기를 들이밀며 겁을 주거나, 전기이발기 등으로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밀거나 신체 일부를 불법 촬영해 협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최근 이들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초범이고 나이가 어린 점, 도주 우려가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며 기각했다. 경찰은 구속영장이 기각된 4명 이외에 범행에 가담한 다른 학교 동급생 4명도 추가로 입건했다.
이들 8명 모두 중학생 때 A군과 같은 학교에 재학했으며 고교 진학 후 일부는 다른 학교로 배정됐음에도 지속해 A군을 괴롭혀 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응답이 62%인 여론조사 결과가 26일 나왔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는 지난 23~25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국지표조사(NBS) 결과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긍정 평가한 비율은 ‘매우 잘하고 있다’ 37%, ‘잘하는 편이다’ 25%를 합쳐 62%를 기록했다고 이날 밝혔다. 이는 취임 직후인 6월2주 조사 대비 9%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이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 못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21%, 무응답은 17%였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세가 약한 대구·경북(TK)에서도 긍정 평가가 48%로, 부정 평가(31%)를 앞질렀다. 지역별로는 광주·전라가 84%로 가장 높았고, 인천·경기와 강원·제주가 각각 64%로 뒤를 이었다. 서울은 56%로 전국 평균보다 낮았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63%로,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직후 54%보다 9%포인트 높았다.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 인선에 대해 ‘잘했다’는 응답은 45%, ‘잘 못했다’는 31%였다.
추가경정예산 편성은 61%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은 21%에 그쳤다.
정당 지지도는 민주당이 45%, 국민의힘 20%, 개혁신당 5%, 조국혁신당 4%, 진보당 1%로 조사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건축의 실천은 항상 자본을, 때로 권력을 필요로 한다. 건축가의 능력은 멋진 도면을 그리는 것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설계와 실행의 기회를 만들고 잡아야 한다. 김수근은 능력을 갖추고 기회를 잡은 걸출한 건축가였다. 권력 비호의 처세가였다고 그를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고문의 설계자였다는 비난은 죽은 건축가에 대한 모독이다. (서현 ‘죽은 건축가를 위한 변론’ 중)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은 2019년 8월30일자 중앙일보에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을 두둔하는 글을 썼다. 그것도 ‘남영동 대공분실’의 설계자 김수근을. 리영희와 김근태의 또렷한 증언과, 서울대 3학년생 박종철 사망 사건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고문 현장이었는지를. 그래도 서현은 김수근이 고문시설을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주장을 “상상이 그려낸 마귀의 형상”이라고 비판했다. 1977년 지은 남영동 대공분실은 2025년 현재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되었다. 6월 개관을 앞두고 서현에게 6년 전 글에 관해 물었다.
“세상에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우리 여기서 사람들을 고문할 거니까 고문에 적당한 건물을 만들어주세요’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할 수 있나. 고문은 암암리에, 불법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고문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공간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고문을 염두에 두고 공간을 설계했다’는 전제부터 성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 고통받았다는 사람은 많고, 그들의 기억은 생생하다. 연행 직후 묵직한 철문 닫히는 소리에 덜컥 내려앉은 가슴, 5층 취조실 복도로 곧장 올라가는 나선형 철제계단에서 느낀 어지러움과 두려움, 복도 양쪽 취조실 문이 서로 엇갈려 문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때의 막막함, 차라리 목숨을 끊고 싶었지만 머리 하나 내밀 수 없는 좁은 창에서 다가온 절망… 이는 정말 김수근이 의도한 감정일까.
우선 나선형 계단. 5층 외 다른 층엔 입구조차 내지 않은 이 계단은 대공 혐의자 동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선형 계단은 공간사옥(현 아라리오갤러리) 등 김수근의 설계작에서 종종 보이는 요소다. 직선 대신 곡선을 쓴다는 심미적 이유, 면적을 조금 차지한다는 실용적 이유가 모두 작용한다.
다음은 문이 엇갈린 복도. 복도가 아주 넓지 않은 한 서로 마주 보는 문이 동시에 열리면 충돌이 생길 수 있다. 공동주거·숙박시설에서 보통 각 가구의 문을 엇갈리게 내는 이유다. 그래야 사생활도 보호된다. 이러한 설계상 관습이 남영동 대공분실에 그대로 적용됐을 수 있다.
그리고 좁은 창. 당시 치안당국 딴에는 사회적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사람을 가두는 시설이었으므로 창을 마냥 크게 낼 수는 없었다. 큰 창을 내면 쇠창살을 설치했을 것이다. 피조사자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는 게 목적이라면, 아예 창을 두지 않는 선택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고문시설’을 상정한 게 아니라고 해도 김수근이 지독한 ‘감금시설’을 설계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취조실마다 피조사자의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는 녹음 장치, 감시카메라, 외시경이 설치됐으며, 용변을 볼 때조차 몸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1976년 김수근의 사무실에서 작성한 도면이 건조하게 전하는 부분이다. 설계 배경과 과정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이. 그다음은 추론과 상상의 영역이다.
네,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중략)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성해나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중)
소설가 성해나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설계 과정을 상상해 이야기 한 편을 썼다. 소설 속 건축가인 스승 여재화는 처음 해보는 종류의 일감 앞에 머뭇거린다. 반면 제자 구보승은 침착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설계를 쭉쭉 밀고 나간다. 역시 대공분실 설계 과정을 각색한 연극 <미궁의 설계자>(작가 김민정)엔 김수근을 떠올리게 하는 건축가 김 선생이 등장한다. 김 선생의 지시를 받아 설계를 도맡은 문하생 양신호는 작업 내내 번민한다. 이렇게 픽션의 건축가는 이 감금시설을 설계하며 어떤 불길함을 감지한다. 현실의 김수근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했을까.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안창모는 김수근이 이 건물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김수근이 바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고 비판한다. “당시 유신 체제는 긴급조치를 남발하면서 누가 봐도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사건을 조작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건물이 어떻게 쓰일지 몰랐다? 그것은 김수근을 보호하는 게 아니다. 김수근은 가장 높은 클래스의 정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수근이 ‘2인자’ 김종필과 막역했던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안창모는 김수근을 위한 최선의 변명은 “어차피 비인권적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는데 그나마 기본권을 누릴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만들어주자, 이렇게 판단했을 거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201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뢰로 남영동 대공분실 관련 연구를 수행했다. 1970년대 대공분실 중 옥인동만 봐도 남영동보다 시설이 훨씬 후지다는 것이다. 물론, 관대하게 해석했을 때의 이야기다.
안창모가 보기에 김수근은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를 “기꺼이 했다”. 나선형 계단이 남영동 대공분실과 공간사옥에 똑같이 등장하는 것처럼, 대공분실의 입구는 1년여 뒤 설계한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의 입구와 닮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감싼 검은 벽돌은 공간사옥 역시 감싸고 있다. 김수근은 1960년대 후반 한국 건축의 본질을 고민하면서 검은 벽돌의 매력에 빠져든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김수근 작품세계의 어엿한 일부라고 봐야 한다.
자네, 요새도 형사가 찾아오나? (중략) 얼마 전에 치안국, 정보부 간부들하고 술 먹는 자리에서 <공간> 신입사원 중에 문제 인물이 있는데 아느냐고 묻더군. (중략) 걱정 말고 일이나 잘해. 자네는 내게 맡기라고 했어. (유홍준 <당신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입니까?> 중)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은 1976년 10월 김수근이 창간한 건축잡지 ‘공간’ 편집부에 합류했다.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경찰 감시를 받았는데, 차마 회사엔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수근이 직접 정보를 듣고 와서는 되레 그를 격려했다는 거다. 이후 형사는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유홍준이 회고한 시기는 한창 남영동 대공분실을 짓던 때다. 김수근은 치안국을 좌우할 정도로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왕당’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배포와 언변이 남달라 호감과 믿음을 주는 캐릭터였다.
<김수근 건축론>(1996)을 쓴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 정인하는 김수근에게서 어떤 내면의 분열을 읽는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외향적이면서 권력과의 결탁을 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내향적이면서 자신의 고유한 감성에 집중한다. 그 공존이 좀 의아하다. 보통 사람이면 조화가 잘 안되는 성향인데 그게 다 있다. 일기나 메모를 보면 그런 분열적인 면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좀 보인다.”
남영동 대공분실 이후 김수근은 서대문 치안본부(현 경찰청) 설계도 수주한다. 건축가는 원래 그런 존재다.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적어도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싶다면. 김수근은 남다른 조형 감각의 소유자였다. 권력과 야합해 재능을 제한 없이 발휘했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는 대사를 통해 묻는다. “그에게 과연 속죄의 마음이나 부끄러움은 있었을까요?” 김수근은 민주화 전인 1986년 간암을 앓다 죽었다. 20여년이 지나서야 남영동 대공분실이 그의 작품이란 사실이 알려진다. 김수근이 살아 있었다면 과거를 참회했을까? 이런 가정조차 무색한 지금, 우리는 대체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호랭이도 지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저기 오네.” 의미를 설명하는게 새삼스러운 이 대사를 수어로 풀어낸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무대에는 사람만 있는데 ‘호랑이가 왔다’고 하면 생뚱맞고, ‘누군가 나타났다’고만 하면 느낌이 살지 않는다.
지난 2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최황순 수어통역사(52)는 “다행히 수어에 ‘호랑이랑 딱 맞닥뜨렸네’라는 관용 표현이 있었다”며 손짓으로 ‘어흥’을 하고 얼굴을 힘차게 가르켰다. 최씨가 전달한 손말은 지난 12일 개막한 국립극단 연극 <십이야>의 한 장면. 그는 “연극은 시각과 소리 정보가 합쳐지기 때문에 대사를 단순 전달해서는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무대에 서는 수어통역사들도 막혀있는 의미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극단은 장애인의 관람 장벽을 낮추기 위해 한국수어통역과 한글자막해설 등을 제공하는 ‘접근성 회차’를 운영하고 있다. 개막일(12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십이야>의 접근성 회차는 ‘그림자 수어 통역’으로 운영돼 또다른 볼거리가 됐다. 얼굴을 허옇게 칠하고 시커먼 무대 의상을 입은 수어통역사 7명이 배우 옆에서 실시간 수어 통역을 제공한 것이다.
재치 넘치는 무대로 정평 난 임도완 연출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십이야’를 조선시대로 옮겼다. 일란성 쌍둥이 남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네 남녀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라는 뼈대는 그대로지만, 마당놀이나 탈춤처럼 신명나는 무대가 펼쳐진다. 사투리와 외국어가 뒤섞인 대사에 감각적인 음악과 움직임이 더해져 객석에선 쉴새없이 웃음이 터지는데, 문득 수어통역사들이 이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심지어 배우랑 ‘티키타카’ 합을 맞춰 연기까지 선보인다.
“<십이야>도 꼬박 한 달은 걸렸어요. 제가 미리 초벌 번역은 해놓고요. 한 달 기준으로 절반은 각자 맡은 부분 번역에 힘을 쏟고, 나머지 절반은 무대에서 움직임을 맞추는데 쓰게 되죠. 특히 이번 공연엔 배우 출신 통역사가 네 명이나 참여했습니다.”
연극은 ‘서브텍스트’라고 할 만한 의미 정보가 얽혀들기 때문에 일반적인 수어 통역 보다 까다롭다. “추리물에서 ‘블랙커피’가 사건의 결정적 단서라고 하면 배우가 대사에서 강조를 하든 커피 앞에서 뜸을 들이든 관객들이 나중에 깨달을 수 있도록 암시할 수 있죠. 수어 통역을 하면서 ‘숨은 정보’를 대놓고 설명하거나 지시하면 극의 재미가 떨어지잖아요. 손짓을 느리게 하든 인상을 쓰든 방법을 강구해야죠. 배우들의 감정 연기나 비유적 표현도 마찬가집니다.”
임도완 연출은 지난해 <스카팽>에 이어 <십이야>에서도 수어통역사들을 배우처럼 무대에 올려 재미를 배가시켰다. “극 마지막에 쌍둥이 오빠 미언의 정체가 밝혀지고 신원 확인을 위해 경상도 사투리 ‘데이~’를 시키는 장면이 있어요. 배우가 ‘제가 진품입니데이~’라는 대사를 하면서 머리를 넘기거든요. 사투리를 표현하기 위해 ‘데이’에서 어깨를 튕기고 머리를 따라 넘겼죠. 또 결혼식 장면에서 대부분 관객들이 모를 프랑스어와 한국어가 번갈아 이어지는 웃긴 부분이 있는데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영어 수어를 사용해보기도 했고요. 저희가 고민한 디테일들입니다.”
최씨는 1997년 민간 수화통역사 자격증 시험 1기로 합격하며 이듬해 활동을 시작한 베테랑이다. 2019년쯤부터 국·공립 극장을 중심으로 수어 통역이 확산한 이후 그간 참여한 공연만 서른 편 정도. 통역사들 사이에선 ‘원전주의’와 ‘해석주의’ 사이의 고민도 있었다고 한다. “‘연출 의도가 있었을테니 표현을 그대로 써야 한다’와 ‘그대로 옮기면 말이 안 통할 수 있으니 바꿔야 한다’는 입장차가 있는거죠.”
최씨는 열악한 소극장에서의 경험이 방향성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아는 농인 관객이 수어통역사와는 가까운데 자막 모니터가 안보이는 자리에 앉았어요. 연극이 끝나고 번역이 어땠냐고 물으니까 그런 건 됐다면서 ‘할머니가 치매였냐’고 자기가 궁금한 내용을 묻더라구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분이 극의 흐름이 이해되니까 빠져든거였죠. 단순 번역이 아닌 각색으로, 연극을 이해하게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최씨가 생각하는 문화 향유의 기본은 ‘선택권’이다. “내가 시간이 안돼서 안 갈 수는 있는데 볼 기회조차 없어선 안되잖아요. 장애인들의 선택권 보장을 통해 공연의 저변 자체가 넓어질 수도 있고요.”
접근성 회차가 있는 날이면 명동예술극장 주변 맥도날드에선 수어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띄는 것도 그간의 변화다. “아는 분을 발견하면 ‘오늘 공연 어땠어?’ 물어봐요. 그럴 때 짜릿한 피드백이 있어요. ‘쌤, 눈이 되게 시원했어!’ 최고의 수어 칭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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